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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국 정치위기로 번지는 인플레
남미 에콰도르에서 20일 가까이 지속된 원주민 주도 반정부 시위가 18일 만에 끝났다. 시위를 이끈 원주민 단체는 지난달 30일(현지 시각) 천주교계 중재로 진행된 대정부 협상에서 경유·휘발유 가격을 갤런당 15센트(약 195원)씩 내리고 저소득층 대상 유류비 지원 정책을 마련하겠다는 안을 받아들이고 시위를 풀었다. 에콰도르 인구의 7%인 원주민은 상당수가 빈민층이고 만성적인 빈곤과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중순 산발적으로 시작됐던 시위는 들불처럼 확산됐다.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타이어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으로도 비화했다. 수천명이 수도 키토로 행진하며 기예르모 라소 대통령의 퇴진까지 요구해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포됐다.
코로나 사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남미와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서 반정부 시위나 파업이 들불처럼 확산하고 있다. 휘발유·비료 등의 가격 폭등에 분노한 민심을 다독일 만한 해결책을 개도국 정부가 제시하지 못하면서 일부에서는 정권 존립 위기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에콰도르와 국경을 맞댄 페루에서는 화물 노조의 집단 파업으로 전국 물류망이 마비 상태다. 연료비 급등에 따른 대책을 정부에 요구해왔던 노조는 정부와 협상이 결렬되자 지난달 27일부터 파업에 돌입했다. 화물 운전기사들이 빈 트럭들로 행렬을 이뤄 고속도로를 서행하며 정부에 해결책 마련을 요구했다. 페루 정부도 29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화물 노조뿐 아니라 농민 단체들도 치솟는 비료값 문제를 정부가 해결하지 않을 경우 집단 파업에 들어가겠다는 입장이다. 페루는 현재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이 부패 혐의로 검찰 수사를 앞둔 상황이라 국면을 타개할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혼란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남미 2위 경제 대국 아르헨티나도 화물 트럭 기사들이 주축인 운송 노조가 유가 급등 문제 해결을 정부에 요구하며 일주일간 파업을 벌이다 정부의 중재로 가까스로 현업에 복귀했다. 그러나 일부 산하 노조가 타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반발하고 있어 언제라도 다시 총파업이 재발할 수 있다.
지난 4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고 국제통화기금(IMF)과 구제금융 협상 중인 스리랑카에서는 연료 부족 여파가 서민층을 넘어 전 계층을 덮치고 있다. 스리랑카는 경제난으로 민심이 악화하면서 4월 총리가 교체됐지만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스리랑카 정부는 28일 휘발유 부족 사태 대응책을 발표하고 오는 10일까지 병원·식료품·철도 운송 등 필수 부문에 대해서만 휘발유를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또 비용 절감을 위해 관공서와 민간기업, 각급 학교의 통근·통학까지 제한하기로 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공무원들에게 주 4일만 근무하도록 하고 식량은 스스로 채소를 재배하는 방법 등으로 마련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주로 행정 업무만 하던 공무원들에게 스스로 농사를 지어서 먹거리를 조달하라는 황당한 지침을 내린 것이다.
서아프리카 가나도 휘발유 값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확산하면서 정정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수도 아크라에서 항의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경찰이 최루탄까지 발사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야당은 시위대를 물밑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정치적으로 안정됐다는 평가를 받는 가나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상당수 경제학자는 이번 경제 위기가 2008년 금융 위기 때보다 지구촌에 더 큰 충격을 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미국의소리(VOA) 방송이 1일 보도했다. 특히 정권의 기반이 취약하고 가구 비용에서 연료나 비료의 비중이 크고 인구가 많은 개발도상국일수록 충격의 강도가 심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세계은행의 쥐스탱데미안 귀네트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전례 없는 원유 값 폭등 등 최근의 에너지 시장 충격은 앞으로 세계 경제에 향후 수년간 타격을 입힐 것”이라고 전망해 이 같은 사태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을 시사했다.